그를 처음 만난 날, 그는 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대화는 단답으로 돌와왔다. “아니요.” “네.” 두 마디와 점 세 개가 오랜 시간 대신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게으름이라 부르지만, 나는 배웠다. 은둔은 게으름이 아니라 두려움과 상처가 쌓여 굳은 생활의 리듬이라는 것을.
우리는 목표를 아주 작게 세웠다. 커튼을 열어 빛을 3분 맞기. 방 안에서 스트레칭 2개만 하기. 현관 앞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기. 실패해도 괜찮다는 문장을 큰 글자로 기록했다. “내일은 오늘의 절반만 해도 돼요.” 작은 약속들이 쌓일 때 사람의 마음은 시나브로 방향을 튼다.
가족에게도 부탁했다. “왜 못 하니?” 대신 “오늘은 여기까지 했구나.” 평가보다 관찰을, 설교보다 밥 한 그릇의 온기를. 대면이 어려우면 메신저로 시작하고, 대화가 막히면 날씨 얘기만 해도 된다고. 말이 통하지 않는 날엔 옆에 있어 주는 일이 가장 큰 문장이라고.
어느 날, 그가 사진을 보냈다. 교통카드 잔액이 1,800원 줄었다. “버스를 한 정거장만 탔어요.” 그 스크린샷을 한참 바라봤다. 큰 변화는 보통 이런 자잘한 소식의 옆모습으로 도착한다. 실패의 기록도 남겼다. 약속한 시간에 못 일어났고, 사람 많은 카페에서 5분을 못 버텼다고. 우리는 그 페이지 위에 연필로 덧썼다. “괜찮아요. 그럼 내일은 조용한 벤치에서 3분만.”
봄바람이 도는 즈음, 그는 머리를 다듬고 셀카를 보냈다. “창문을 열었더니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갔어요.” 바람의 촉감은 누군가에게 아무렇지 않지만, 어떤 이에게는 복귀의 첫 언어가 된다. 이후로도 오르막과 내리막은 있었다. 하지만 길은 더 이상 끊긴 선이 아니었다. 돌아서도 이어지고, 멈춰도 사라지지 않는, 지도 위의 굵은 방향 화살표처럼.
상담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혼자서는 무거워진 문을 함께 조금 더 밀어 보는 일, 두려움을 다 없애기보다 두려움과 같이 걷는 방법을 익히는 일. “다시 사회로 나왔어요.” 그 말은 도착의 선언이 아니라 방향의 약속이다. 오늘의 한 걸음이 내일의 두 걸음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오늘의 한 걸음이 없으면 내일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로 기억하는 일.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방 안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약함이 아님을 전하고 싶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상담자에게 “나 아직 준비가 덜 됐지만, 같이 걸어줄 수 있나요?”라고 말해도 좋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고, 천천히 걸을 수 있으며, 때로는 멈춰 설 수도 있다. 변화는 요란하지 않다. 마음의 온도가 한 도씩 오르는 동안, 사람은 시나브로 돌아온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문을 여는 작은 소리, 발자국 하나, 카드 단말기의 ‘삑’ 소리 같은 사소한 증거들이 모여, 우리는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을.